강기훈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아프고 화가 난다. 23년 만에 재심을 통해 무죄가 선고되었으면, 검찰은 과거 무리한 기소를 사죄하며 그 판결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마땅하다.

 

그런데 오히려 엉뚱한 이유로 대법원에 상고했다니 기가 막힐 뿐이다. 내가 이 일에 더 안타까워하는 까닭은 나도 강기훈의 이른바 유서 대필 사건에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1991년 4월 어느 봄날, 명지대 1학년 학생 강경대가 시위 도중 경찰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사인을 밝히고 책임을 묻는 과정에서 반민주 억압정치에 항거하는 시민들의 죽음이 이어졌다.

 

당시 3당 야합으로 이루어진 민자당 정권에 맞서 국민들은 ‘민자당 일당독재 분쇄와 민중 생존권 쟁취 국민연합’이란 연대 투쟁기구를 만들었는데, 내가 집행위원장을 맡아 집행을 총괄했다.

 

경찰이나 검찰, 법원은 독재정권의 충견 노릇에 충실했을 때다. 오죽했으면 박종철의 사인을 ‘탁 치니 윽 하고 죽더라’고 공식 발표할 정도였을까? 민주화 이후 재심을 통해 속속 무죄로 밝혀지고 있는, 수많은 고문 등으로 날조된 사건들만 보더라도 그 당시 상황을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당시 분신이나 투신 등 자결사건이 생기면, 검찰이나 경찰은 그것을 은폐 혹은 왜곡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시신을 탈취해서 일방적으로 조사하고 화장해버리는 경우도 많았다.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씨의 시신을 경찰이 영안실 벽을 뚫고 들어와 탈취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당시 강경대 학생의 시신도 경찰은 집요하게 졸속적인 부검을 요구했다. 하지만 대책위의 끈질긴 저항과 첨단 진료기구의 동원, 양심적 의사의 협조 등으로 어렵게 사인을 밝혀내기도 했다.

 

열사정국이 당시 부도덕한 정권을 위기로 몰아가자 조선일보 등 수구언론은 김지하로 하여금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는 칼럼을 쓰게 하는가 하면, 박홍 신부와의 인터뷰를 통해서는 “연쇄 죽음을 부추기는 검은 세력의 배후가 있다”는 등의 왜곡된 주장으로 정국을 혼란스럽게 했다. 이런 때 시민단체 간부가 투신했다. 검찰이나 수구언론이 가만 있을 리 없었다. 처음부터 의심의 눈으로 봤다.

 

그러나 우리 대책위는 순진하게도 인간의 건강한 상식을 믿었다. 어떤 경우라도 누가 누구의 유서를 대신 써주고 죽게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더군다나 같은 단체에서 일하는 친구 사이에서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길을 막고 아무에게나 물어봐도 그건 상식이 아니라고 답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건 실체적 진실에 관한 문제라고 판단, 검찰에 협조해서 모든 자료들을 넘겨주기로 했다. 실제 요구하는 대로 다 넘겨주었다. 큰 실책이었다. 검찰의 생각은 처음부터 일반 상식과 달랐다. 결국 검찰은 모든 자료를 강기훈이 유서를 대신 써주며 친구이자 동지의 자결을 도왔다고 조작하는 데 이용했다.

 

국과수의 엉터리 필적감정이 동원됐다. 이것이 강기훈 사건의 전말이며 실체다. 법원이 한통속이 되면 모든 게 끝이다. 그래서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은 조작, 왜곡된 채 역사의 화석이 되어 갔다.

 

이와 비슷한 사례는 2009년 용산참사 때에도 일어났다. 사건의 상식적 판단으로도 그건 분명 경찰의 과잉진압에 의한 죽음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검찰은 피해자를 가해자로 둔갑시켰다. 그러다 보니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반인륜적인 몰상식의 상황을 만들어낸 것이다.

 

경찰·검찰·국정원 등 대표적 국가 권력기구가 그 권력을 악용하여 저지르는 비상식적 만행은 엄청난 범죄행위다. 그럼에도 법원마저 눈 감아버리니 사회 정의나 질서가 무너져버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결국 역사를 퇴행시켜 몰염치의 천박한 사회로 만들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사회 정의를 무색케 하는 몰상식한 일은 이것만이 아니다. 쟁위행위는 헌법에 보장된 권리다. 그 쟁의행위를 하는 노조나 노동자에게 무리하게 업무방해나 폭력행위 등을 적용해 상상할 수 없는, 도저히 이행이 불가능한 액수의 손해배상 청구와 가압류를 통해 아예 경제생활 자체를 봉쇄해버리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고 있다.

 

쌍용자동차는 최근 고법에서 정리해고가 요건을 갖추지 않아 무효 판결되어 해고자의 복직이 확정됐다. 그럼에도 쌍용자동차 사측과 대한민국 정부, 경찰, 메리츠화재는 187명의 조합원과 간부, 상급단체인 민주노총, 금속노조 등에게 손해배상 302억원과 이에 따른 가압류 28억9000만원을 요구하고 있다.

 

302억원이 1년에 몇백억원씩 배당을 받고 연봉이 수십억인 재벌회사 주인들이나 임원들에게는 별것 아닌 숫자인지 모른다. 하지만 노조 간부나 노동자들에게는 감옥살이는 고사하고 죽음보다 더 무서운 액수다. 그래서 해고 이후 그 절망감으로 24명이나 되는 간부나 조합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민주노총 사업장에서만 한진중공업 158억1000만원, 코레일 313억2000만원, MBC 195억1000만원 등 파악된 것만으로도 1691억6000만원에 이른다. 이것이야말로 상식을 초월하는 것이다.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가 돈으로 모든 것을 가름하고 돈의 가치가 모든 것 위에 있다고 하더라도 노동자 없는 회사, 사람 없는 세상이 무슨 의미와 가치가 있을까. 그러니 최소한의 상식마저 무너져버린 사회에서는 노동자는 자본가의 기계가 될 수밖에 없고, 사람은 자본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길은 없을까. 겨울 땅 속에서도 뿌리와 씨앗이 자라고, 얼음장 밑으로도 물이 흐르며 봄을 만들 듯이, 또 다른 인간과 또 다른 상식이 새로운 사회를 만들고 있다. <손잡고> 운동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지난 연말과 올해 초, 연달아 쌍용자동차노조, 철도노조, 한진중공업노조, 현대자동차비정규직노조 등에 수십억, 수백억원의 손배와 가압류 판결이 떨어지는 걸 보며, 최근 몇 년 동안 파업에 대한 보복성 손해배상과 가압류로 노동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가족들이 고통당하는 상황인데도 우리 사회가 이 문제에 대해 무심하고 아무런 대응이 없었다는 자각이 일어났다. 그에 따라 조국 교수 등 몇몇 분이 앞장서면서 이 운동은 시작되었다.

 

거창한 기구나 조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법·제도를 개선하고 사회적인 인식을 바꾸기 위한 작은 행동이라도 해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마침 주간지 <시사인>의 어느 독자가 47억원 배상판결을 받은 쌍용자동차노조 기사를 읽고 상상도 안 되는 액수이지만 10만명이 4만7000원을 낸다면 함께 책임질 수도 있다는 편지와 함께 돈을 보낸 걸 계기로 이 운동은 새로운 대중운동으로 번져나갔다.

 

애들 학원비를 아껴 보낸다는 어느 주부의 사연에 마음 아파한 가수 이효리도 동참하면서 1만명 참여에 4억7000만원 모금이라는 1차 목표가 15일 만에 달성되는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이다.

 

어찌 보면 기적 같은 일이나, 주변의 누군가 힘들고 아파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함께 아파하며 함께 책임지려는 건강한 생각과 실천이 만들어낸 보다 성숙한 사회의 한 모습이다. 이러한 일이 상식으로 뿌리내릴 때 우리 사회는 더욱 튼튼하고 강해지리라 생각된다.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 용산참사 사건 등이나 노조나 노동자에 가해지는 비상식적인 손배, 가압류 등에서처럼 잘못된 국가권력이나 자본의 횡포는 끊임없이 역사를 되돌리고 사회를 악화시키려 한다.

 

그렇다고 해도 더불어 살아가려는 건강한 시민의식이 상식으로 자리잡아가려는 노력이 끊이지 않는 한, 우리 사회는 한걸음씩 성숙한 사회로 발전해 나갈 것이다.

 

<이수호 한국갈등해결센터 상임고문>